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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의 환상적인 주얼리
글쓴이 관리자 (IP: *.234.149.32) 작성일 2017-01-04 15:28 조회수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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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가 미국의 부유한 예술 후원자 커레스 크로스비의 버지니아주 플랜테이션 농장에 머무른 시기는 1941년이었다.

 

 

달리는 전도가 유망한 주얼리 디자이너 풀코 베르두라 공작(그의 이름은 코코 샤넬과 플라토의 이름을 섞어 만든 것이다.) 초대, 콜라보레이션을 제안했다. 하지만 베르두라는 햄톤 매너에 도착하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숙소는 자신이 상상했던 우아한 대저택이 아니라 전기나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황량한 폐허 같은 곳이었다. 달리는 지저분한 곳에서 베르두라를 반갑게 맞이하며 여러 번에 걸쳐 낡은 집을 피카소의 작업장에 비유했다.

 

 

멍해진 베르두라는 거실의 차디찬 공기 속에서 몸의 감각이 점점 없어져 갔다. 갑자기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베르두라는 그제서야 모든 것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집은 진짜 폐가였다. 달리는 며칠 동안 공들여 이곳을 꾸며 베르두라를 속여 새로운 사고를 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베르두라는 이후 “크로스비의 진짜 집은 너무나 편안하고 아늑했다.”라고 적고 있다. 나중에 베르두라는 방문이 ‘엄청나게 성공적’이었다고 묘사했다.

 

 

예술가는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작품들은 1941년에 달리의 새로운 그림들과 함께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이중 5개의 디자인은 뉴욕현대미술관 달리-미로 쇼에 전시되기도 했다. 해당 작품들은 브로치에서 담배 케이스, 필박스에 이르며, 달리의 미니어처 페인팅이 베르두라가 완성시킨 주얼리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아마도 가장 쇼킹했던 작품은 루비 눈이 박힌 꿈틀거리는 골드 스네이크들이 둘러싸고 있는 메두사 브로치였을 것이다.

 

 

1950년대의 달리는 이보다 복잡하고 환상적인 디자인을 꿈꿨다.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 공방을 가지고 있던 아르헨티나 태생의 주얼리 제작자 Carlos Alemany 의해 복잡한 구상은 환상적인 작품으로 구현되었다.

 

 

부분의 디자인이 하나씩만 제작되었으며, 작품에는 벨기에령 콩고에서 생산된 고급 사파이어, 에메랄드, 라피스 라줄라이, 말라카이트 등이 세팅되었다.

 

 

일부 작품은 기계 작동식이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꽃의 경우 꽃잎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지속적인 박동이 일어나는 심장 모양의 브로치도 있다.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단핵 진주가 열을 지어 박혀 있는 불가사리는 들어 올리면 흐느적거리다가 손이나 , 가슴에 올려 놓으면 달라 붙는다.

 

 

시기의 달리는 이미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1934년에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비난하며 제명시켰고, 1940년대 무렵의 달리는 이상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함께 하지 못했다. 대신 달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을 따르는 화가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1959년에 주얼리 작품 카탈로그를 공개하면서 달리는 “신 르네상스의 주창자로써, 나는 갇힌 상태를 거부한다. 나의 예술은 회화뿐 아니라 물리, 수학, 건축, 과학, 싸이코 뉴클리어, 미스티코 뉴클리어 등을 모두 아우른다.”라고 말했다.

 

 

달리 전문가 엘리엇 킹은 “이 시절의 달리의 작품은 더욱 다채로우며, 조각, 광고, 발레 디자인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달리는 사람들이 화가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점에 인상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달리의 새로운 모험이 상업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를 과하고 저속한 곳으로 추락하는 신호라고 여겼다.

 

사실 예술사가들은 달리의 인생 후반기 작품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때문에 역시 처음에는 달리가 1940년에 완전히 죽어 버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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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은 웃으면서 80년대와 90년대 책들은 모두 시점에서 서술을 끝낸다. 때문에 그가 인생 후반 40 동안에도 예술 활동을 지속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물론 달리가 인생 후반에 완성시킨 작품 모두가 그의 초반 대작인 녹아 내리는 시계나 다리가 가는 기이한 코끼리 그림처럼 예술계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는 예술계 트렌드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1940년대의 뉴욕은 잭슨 폴락을 비롯한 추상표현주의 작가에 매료되어 있었다. 킹은 “마돈나를, 그리고 주얼리를 디자인하는 달리는 시대의 평론가와 미술관들이 보여주고 싶어했던 작품과는 너무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달리의 후기 작품은 전부터 재평가되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0년에 킹은 ‘달리: 후기 작품’이라는 전시회를 기획, 아틀란타의 High Museum of Art 올려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킹은 “달리가 1960년대 아트의 선구자가 되어 창조해 그림, 주얼리 디자인, 심지어 모험적인 광고 작품, 그리고 그의 행동들 모두가 재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의 후반 작품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40년대와 50년대에 그가 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흥미롭게도 새롭다거나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달리의 주얼리 작품들 대부분은 스페인 피게레스에 있는 달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겸손하게 말할 몰랐던 달리는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에 따르면, 순수하게 아름다운 작품, 유용하지는 않으나 훌륭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효용성과 물질주의가 중요시 되는 시기에 높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라고. 역사가 그의 작품을 인정하기까지 달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의 주얼리 거작들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을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 아비게일 케인 

 

 

출처 : 귀금속경제신문(www.diamond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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